
영국 서머싯 카운슬(Somerset Council) 도서관 서비스가 로마 시대 금반지 ‘일민스터 링(Ilminster Ring)’을 3D스캔해 물리 복제본을 만들었다. 원본과 복제본은 8월 20일 영국 일민스터 아트센터에서 열린 발견 기념 행사에 나란히 전시됐다. 보호 대상 유물을 직접 다루지 않고도 형태와 장식을 살펴볼 수 있게 한 문화유산 활용 사례다.
반지는 2018년 잉글랜드 남서부 일민스터 인근에서 금속탐지 활동 중 발견됐다. 남서부문화유산신탁(South West Heritage Trust)에 따르면 서기 297년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로마 동전 꾸러미와 함께 묻혀 있었다. 표면에는 승리의 여신 빅토리아가 두 마리 말이 끄는 전차를 모는 장면이 새겨져 있다. 신탁이 서머싯 카운슬을 대신해 유물과 동전을 소장하면서, 지역 도서관의 디지털 제작 장비를 활용한 복제 프로젝트가 추진됐다.
속이 빈 반지를 일곱 방향에서 기록
작업에는 영국도서관 지원으로 마련된 휴대형 3D스캐너와 서머싯 도서관의 크리얼리티 Sermoon P1 스캐너가 사용됐다. 큐레이터가 반지를 폼 위에 놓고 회전판에서 조금씩 움직였으며, 주변에 배치한 흰색 기준 마커가 스캐너의 위치 추적을 도왔다. 레이저가 표면까지의 거리를 연속 측정해 수천 개의 점으로 이뤄진 점군 데이터를 쌓는 방식이다.
한 번의 스캔만으로는 반지 안쪽과 밑면까지 기록하기 어렵다. 제작팀은 속이 빈 구조를 빠짐없이 담기 위해 자세를 바꿔 모두 일곱 차례 스캔했다. 반지의 미세한 비대칭은 서로 다른 데이터에서 같은 위치를 찾는 단서가 됐다. 각 스캔을 하나의 형상으로 정렬한 뒤 배경과 불필요한 점을 제거하고, 가장자리를 다듬고, 작은 빈틈을 메워 출력 가능한 디지털 모델로 정리했다.
형상 데이터와 별도로 색과 표면 질감을 담는 스캔도 진행됐다. 금빛 몸체와 푸른빛 장식의 외관 정보를 디지털 형상 위에 입혀 화면에서 원본에 가까운 기록을 만들었다. 다만 공식 자료는 물리 복제본에 사용한 프린터 종류, 출력 재료, 적층 높이와 색 표현 방식은 공개하지 않았다. 따라서 디지털 모델의 색상 기록과 출력물의 재료·마감은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다.
보존용 원본과 체험용 복제본의 역할 분담
사진은 유물의 한쪽 면을 고해상도로 남길 수 있지만, 3D스캔은 둘레와 안쪽을 포함한 공간 형상을 기록한다. 이 데이터로 만든 복제본은 관람객이 손에 올리거나 여러 각도에서 살펴보는 교육 자료로 쓸 수 있다. 원본을 반복해서 이동하거나 접촉할 때 생기는 위험을 줄이면서도, 유물의 크기와 입체감을 전달할 수 있다는 점이 이번 작업의 핵심이다.
디지털 기록은 전시가 끝난 뒤에도 다른 크기의 모형을 만들거나 화면에서 확대해 장식을 살피는 기반이 된다. 동일한 데이터로 여러 복제본을 만들 수 있어 학교 수업이나 접근성 프로그램으로 확장하기도 쉽다. 반면 스캔 해상도, 가려진 면, 후처리 과정에서의 보정은 결과에 영향을 준다. 정밀한 형상이라는 표현이 곧 원본의 모든 물성까지 재현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렇다고 복제본이 원본을 대체하는 것은 아니다. 스캔 데이터는 측정한 외형을 재현하지만 금속의 조성, 제작 흔적, 매장 환경이 남긴 변화까지 모두 담지는 못한다. 원본은 보존과 학술 분석의 대상이고, 디지털 모델과 출력물은 접근성을 넓히는 기록·교육 매체로 역할이 나뉜다.
서머싯 도서관은 약 10년 동안 주민·학교·지역단체·기업에 3D설계와 출력 서비스를 제공해 왔다. 전동 이동기기 업체를 위한 맞춤 부품 시제품과 지역 프로젝트용 대형 주사위도 제작했다. 이번 반지 복제는 산업용 시제품 제작에 쓰이던 같은 디지털 작업 흐름이 지역 유산의 보존과 해설로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